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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칠중성 - '칠(七)'자 기와에 '묻지마' 사적지정…'왜? 1500년 국제화약고였으니까'

관리자 2025-03-10 14:37:07 조회수 29

이기환의 Hi-story

칠(七)'자 기와에 '묻지마' 사적지정…'왜? 1500년 국제화약고였으니까'

 

 

겨우 ‘칠(七)’라고 찍힌 명문 기와 조각이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덕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2002년 1월) 산성이 있습니다. 

경기 파주 적성 중성산(해발 148m)에 조성된 칠중성입니다. 변변한 발굴조사 한번 없었습니다. 

1982~2022년 사이 6차례에 걸쳐 지표 및 정밀지표조사를 벌이는데 그쳤습니다. 

리니지2M 사이하 업데이트

다만 2000년 정밀지표조사 때 성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 중 ‘칠(七)’명 기와조각이 나온게 눈길을 끌었습니다. 

한데 문화재위원회는 “더이상 볼 것도 없다. 향후 발굴조사 할 필요도 없다. 곧바로 사적으로 지정하자”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칠’자 명문 기와조각 1점 나왔다고 ‘묻지마 사적 지정’을 했다는 얘기인가요. 

경솔한 결정이 아니었을까요. 꼭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발굴조사’는 원칙적으로 ‘유적 파괴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발굴 자체가 수백·수천년 된 옛 사람들의 흔적을 파헤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그 유적의 성격이 파악되면 더이상의 발굴을 자제하는게 옳은 판단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칠(七)’자 명문 기와의 수습으로 칠중성의 전모를 밝혀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산성의 나라’지만

‘한국=산성의 나라’입니다. 한반도에서 확인된 산성만 1200곳 정도로 추산되거든요. 

국토의 70%가 산악지형이니 당연지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산악지형을 이용한 ‘청야술’은 고조선 시대부터 정평이 나있었죠. 들판을 비어두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채 장기전을 벌이는 전략·전술이죠. 

산성이 대유행했던 시기가 삼국시대인 4~7세기였는데요.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 등장하는 산성의 절대 다수가 그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중 위치와 역사적인 맥락이 일관성있게 파악된 산성이 둘 있는데요.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과 경기 파주 칠중성입니다. 

 

삼년산성은 “470년(자비왕 13) 삼년산성을 축조했고, 486년(소지왕 8)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덕분에 일찌감치(1973년) 사적으로 지정됐습니다. 칠중성은 어떨까요. “638년(선덕여왕 7)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시작으로 고구려-신라, 신라-당나라 간의 전투 기록이 이어집니다.

‘칠중성’으로 못박은 기록만 그렇고요. 백제 창업주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8)의 일화가 있습니다. 

“기원전 1년 온조가 칠중하에서 말갈의 추장을 잡아~나머지 적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칠중하’는 칠중성 앞을 흐르는 임진강의 별칭입니다. 

칠중성과 칠중하(임진강) 사이에는 아주 수상한 백제 토성이 자리잡고 있어요. ‘육계토성’인데요. 입지 조건이나 형태가 마치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과 닮은 꼴이어서 ‘리틀 풍납토성’ 혹은 ‘풍납토성의 재림’이라 일컬어집니다. 

정리하자면 칠중성을 중심으로 한 임진강 일대는 5세기 후반까지는 백제의 영역이었습니다. 475년 고구려의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 땅이 됐다가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553년) 6세기 후반에는 신라의 영역이 되었을 겁니다. 

 

■“칠중성을 사수하라”

칠중성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국제 화약고가 됩니다. 

대체 칠중성이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시공을 초월한 국제전쟁터가 되었을까요. 

칠중성은 해발 148m에 불과한 중성산에 조성되었습니다. 산이라고 하기에도 남세 스럽죠. 그러나 절대 ‘띄엄띄엄’ 보면 안됩니다. 칠중성 정상에 서면 구불구불한 임진강 북쪽으로 황해도가 손에 잡힙니다. 뒤에는 감악산(해발 675m)이 받쳐줍니다. 설마리 계곡을 따라가면 의정부와 서울이 지호지간(指呼之間)입니다. 한마디로 전략적인 요충지라는 뜻입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638년 신라-고구려간 접전은 ‘칠중성’ 이름 석자를 두고 벌어진 첫번째 전투입니다. 

 

“638년(선덕여왕 7) 10월 고구려군이 북쪽 국경인 칠중성을 침범하자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해서 산골짜기로 피란했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대장군 알천(생몰년 미상)을 급파합니다. 알천은 선덕여왕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11월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알천이 누구입니까. 647년(진덕여왕 원년)에는 상대등(국무총리격) 자격으로 화백회의를 주관했고요. 진덕여왕의 사후인 654년 ‘섭정(대리청정)’을 위임 받았지만 김춘추(태종무열왕·654~661)에게 양보한 인물입니다. 선덕여왕은 그런 핵심인사를 파견할만큼 고구려와의 국경에 위치한 칠중성 방어에 사활을 걸고 총력을 기울였던 겁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30910080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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